你若知道这几“道”就在道中东华禅寺方丈 ┃ 万行大和尚 养正堂开示【东华禅】以人为本,借事炼心觉悟人生,奉献人生你没有正知正见是因为还没【见道】何谓见道?这里所说的见道,并不是指见性的见,而是理上的见。很多人不学佛还比较朴实,一学佛,几年后反而养成了夸夸其谈的习气。动不动就拿佛的境界来衡量周围的人,从不拿这把尺子来衡量自己。学佛不是拿眼睛看别人,而是看自己。所谓的看破,就是见道。为什么很多学佛的人看破了,却放不下?怎么才能放下?一个人见道后,如果不继续修炼,贪嗔痴慢疑仍然会很重。只有通过修道再上一个台阶——证道,才能把这些习气除掉,才能对世间的功名利禄等种种欲望放下。也就是说,一个人要想真正放下,必须在果位上才能做到。一个真正见道的人,他的思想一定是正知正见。但他仅仅是证得初果。证到初果的人只是断了见惑,见惑即理论上的知见。只有当他证道以后,才能超越思惑。实际上,现在好多学佛的人连看破(断见惑)的层次也达不到。当一个人未见道时,对佛法不会生起正知正见,每见到一个大师都会跟着跑。只有见道以后,即便是菩萨来到面前,也会如如不动。因为他有了正知、正见、正定。为什么现在学佛的人很容易动摇,听谁说都有道理,张“大师”、王“大师”,哪个大师都能转动他呢?因为他没有学佛的心得体会,没有自己的佛学思想,不能不被外境转。只有断见惑以后,才看得破,放得下。看破是理论,放下是功夫。通常一些研究佛学理论的人,在见道位上都达到了一定层次,但对修道、证道还把握不了。断见惑是闻法的结果,是学问,是知识;断思惑是修证的结果,是证道,是功夫。你没有智慧是因为还没【悟道】你们可能听说过苏东坡和佛印禅师的一段故事。他们两个关系非常好,在佛学理论上也不相上下。苏东坡是悟了道,没有证道。而佛印禅师已经彻悟、证道。如果把两个人的悟道偈放在一起,未悟道的人看了,分不出功夫的上下。他们两人经常在一起谈禅论道。苏东坡虽然文字般若很高,但实相般若不行,所以常常输给佛印禅师。有一天苏东坡突然有悟,写了一首悟道偈:“稽首天中天,毫光照大千。八风吹不动,端坐紫金莲。”派人送到佛印禅师处。禅师看后,在纸上批了四个字:“放屁、放屁!”并让来人带回。苏东坡一看就暴跳起来,驾着小船就去找佛印禅师理论。船未靠岸,便见佛印禅师已在江边等候,大笑他:“八风吹不动,一屁过江来!”苏东坡言下大悟,忙说:“惭愧、惭愧!”从此,苏东坡对佛法有了更深一层的领悟。因为佛法是从自性中流露出来的,不是想出来的。达摩祖师把修行分为两条路:一是理入,二是行入。苏东坡一向是从理入,而未从行入。实际上理入与行入是不能分开的。现在学佛的人多是夸夸其谈,言行举止浮躁、轻狂,习气一点也没除掉,讲起佛法来却头头是道,到了关键时刻就把佛法抛到九霄云外。佛法是体现在日常功用上,而不是在理论上。一个见道的人仍然有贪嗔痴,还会被业习牵着走。只是在言语上比较善辩,在机锋转语上,一般人比不过。但是从行为上可以看出他是否证道。二祖神光向达摩初祖求法之前,在中原一带已很有名气。当他向达摩初祖求法时,达摩还对他说:“我这是旷劫大法,非小根、小器所能得!”这时的神光在达摩眼里还是小根小器,不配修达摩的法。实际上神光这时已经辩才无碍,早已突破了见惑,达到了修道的层次,只缺证道。佛教讲贪嗔痴三毒,前二毒对一个见道者(超越了见惑)而言,已不存在了,但痴毒仍然存在。因为根本智慧还未打开,无法进入证道位。必须进入证道位,再走出来,才能超越最后一毒。学佛的人都说要开智慧,实际上有几个能开呢?连贪、嗔都超越不了,怎么可能超越最后的痴毒?你把握不住自己的身心是因为还没【修道】在修道之前,必须彻底见道,才能进入修道位。比如在未修道之前,对修行过程中出现的种种反应都要明白。如何明白呢?就是要见道。一个真正见道的人,对以后在修道过程中会出现的问题,以及如何处理,都很清楚。做不到这一点,就不是真正的见道。真正的见道,必须自己身心亲见,有了一些领悟和知见,并不是听别人说。一个真正见了道的人,身心、气质都会有明显的变化,言语也会变得与众不同。尤其在做事上,以及对生死无常的问题,会比常人看得透。实际上修道有一半功夫必须在见道中完成。所谓修道、证道,就是体验它、验证它(所见之道)而已。例如,你们要来东华禅寺之前,对来的方向、方位、坐哪个车次,早已明白。来的时候,按所知的方向、路线去走,肯定不会错。修道、证道也是在见道的基础上上路。未迈步之前已有十分把握,一迈步,肯定到位,绝对不会错。就像一个高明的人做事,不是一边做一边想方案,而是未做之前,已有了方案。一出手,肯定不会出偏差。每一步所发生的情况都不出他所料,与方案完全吻合。古人讲,在闭关之前早已明心见性了。眼前一片漆黑,怎么用功?所以古人有“不破本参不入山,不到重关不闭关”之说。实际上断见惑指的就是明心,也就是见道。严格来讲已进入见性的阶段,但还未从见性中走出来。就像一个人已到达初禅,进入初禅,但还未走出初禅一样。这说明他还未超越初禅。必须走进去,再走出来,才能到达二禅,进入二禅……见道的功夫修成以后,下一步才是修道。修道的过程又分两个层次:一是生理方面,二是心理方面。这两方面需要多长时间能完成呢?如果你的见道是究竟的,是自己亲身经历,不是听别人讲的,花上三年时间修炼禅定,可以扭转身心无始劫以来的业习。这时候才谈得上能把握自己。因为前面的见道是真,再配合实修,一真一实相结合,才做得了主。当生理方面的修道完成以后,再修心理——心态。心态方面有一大半功夫是在红尘中完成的。我曾有个划分方式:在山上,心态只能修到五成,还有一半必须在红尘中完成。因为当你一个人独处,没有面对人、事、物、理的时候,内心世界一片风平浪静,你会误认为自己的业习已经没有了。当面对纷繁复杂的人、事、物、理时,你会发现内心仍在起波澜。在修道的过程中,必须达到每一个起心动念都能觉知到。如果觉知未跟上,说明修道还未开始。即便开始了,也只是在修道途中,还未走出来。就如同走进“观音洞”仅是一半功夫,必须走进后再走出去,才算走完全程。即便你进入修道位,又走了出来,也未必能达到证道位。因为在修道途中,一步比一步更艰难,越到后面,越触动实质问题。你有“我”有业障是因为还没【证道】第一步见道完全是“理”,走完了第一步,进入修道,才与“事”合为一体。达到证道位时,既与事一体,又非一体。为什么这样说呢?比如,当一个孩子落入水中,你敢跳下水把孩子救上岸,自己毫发无损,一口水也没呛到,而且能三番五次轻而易举地这样做,才算真功夫。并非经历一次境界未被转,就算成功了。必须反复打捞,百发百中。一个证道的人随时能进去,也随时能出来。如果进不去,就无法感受众生的喜怒哀乐。如果出不来,也无法超越凡人的喜怒哀乐。你们会问,证道的人是在水中还是在岸上?一个证道的人是无我的,如果他在水中或者在岸上,怎么可能无我呢?观音菩萨之所以有千百亿化身,正是因为无我。众生之所以活得累,正是因为有我。例如一个把金钱看得很重的人认为:这些钱是我的,我必须主宰它。有一天主宰不了时,他就会很痛苦。如果达到了无我,哪里还有金钱的概念?又怎么会痛苦呢?没有带着“我”做事,怎么会有业障呢? 一个人之所以有业障,一是搜集别人的业障,二是承担自己做错事的业障,两者都是因为有“我”存在。有的人之所以庸俗,就是把“我”看得太重了。有的人活得很洒脱,是因为我执比较轻。通常大家都会说“功名利禄,生不带来,死不带去”,实际上,一遇到事情,样样都需要。但要想证道,必须敞开身心,接受周围的一切。如果不敢敞开,不愿意面对周围的一切,别说证道了,就连修道也修不进去。就如一个人之所以能改正错误,是因为他敢于承认错误,面对错误。如果做错了事,不敢承认,不敢面对,就会想办法为自己解释,辩护,开脱。有的人做错了事则是不吭声,佛门里讲这也是一种我慢心的表现。当一个人理屈词穷的时候,不吭声未必是承认错误。佛法是看内心动机的。对一件事看清没看清,放下没放下,自己内心是非常清楚的。现在信佛的人都说自己是“学佛的”。正因为他们不知道如何才算学佛,才会这么说。如果他们明白学佛应该具备什么样的心态、条件和素质,会吓出一身冷汗。正因为没有见道,不知道何为道,才口口声声称自己是修道的。所以古人才讲越学越谦虚,越修越感到自己渺小。实际上,做任何事都是从一个点切入,最后辐射到四面八方,乃至十方。并不是从四面八方切入,最后落到一个点上。所以,佛门里讲“一通一切通,如同太阳处虚空”,照耀整个大地。“空”检验你是【离道】还是【合道】前两堂课我讲“觉念”。觉念后才是择道(法),择道后才是修道。这里的“觉念”与“见道”是吻合的。一个修道人应该念念都能觉察到,而且知道是合道还是离道。有时处于道中,一不留神,念头跑了,又未合道。在什么情况下才算合道呢?并不是只有一心念佛,才算合道。如果一心念佛就算合道,那么一心切菜也算合道了。因为都是一心一意在做一件事,念咒、结印、参话头,也是一心在做一件事。事实上,真正的合道根本不用刻意生出一个念头在念佛、持咒、结印、参话头……。有一句话说“当下是道,何来转?有转便是头安头”。你的心是散乱的,念佛就散乱,做任何事情都散乱;你有一颗一心不乱的心,做任何事情都能一心不乱。如果你不能时刻觉察到自己的起心动念,师父给你一个法,你也修不进去。如果你能时刻觉察到自己的每一个起心动念,就用不着修任何法了。因为你已经破了我执、法执,但还有一个空执未破。我执是主观,法执是客观,都是执著。什么叫空执呢?譬如一个对钱财看得很淡的人随时都在布施,但布施后总喜欢别人把他的名字刻在功德碑上。这说明他把钱财放下了,但还没有把功名放下,也即我执没有放下。有的人做了好事,总希望有人知道。即便没人知道,心里也高兴。这说明他还没有完全达到空。一个真正空了的人,无我、无法,乃至连空也不存在,即佛门里讲的“我空,法空,空也空”。大家经常讲:“无我,无法,一切都是空的。”天天讲空,执著空。如果不从“空”中走出来,还是“有”。有什么?有个“空”的境界存在。一个证道的人做事很努力,求圆满,但过后无痕。按道理讲,如果对一件事要求很高,做完后内心应该还存着这件事,怎么可能过后无痕呢?但事实恰恰相反,只有对一件事全然地努力过,才可能全然地放下。力量完整地来,走的时候也是完整地走,故而能过后无痕。比如学开车,在学的过程中,理论、方法很多,一旦掌握了开车技术,什么方法、理论都不存在了。车一停,心就走掉了,不可能还停留在车上。只有在一知半解的时候,内心深处才会留下痕迹。当我们面对一件事情时,只有全身心地投入才能超越。如果没有一心一意地经营,没有全身心投入地去经历、尝试,就一定会留恋它,回味它。所以发生在我们生活中的每一件事,我们都要全身心投入地去做,去体验。只有全身心投入了,才能得到全部。没有全身心投入,是得不到全部的。就像一个人想闭关,可是闭关后又想着外面的事情,这样就不可能全身心投入地去用功,去感受。所以出关后,他就会留恋,会想再闭关。在红尘中没有全身心投入地去做事,去尝试渴望的事物,一旦修行,对红尘中的事情肯定还会留恋。所以说悟要真悟,修要实修。今天就讲到这里。大家问一问自己:现在是处于见道、修道、证道的哪个层次?只有进入证道位,智慧,也即实相般若才会打开。在未进入证道位之前,尽管你的语言般若、文字般若已经打开了,但还未突破无明。只有实相般若打开了,才能彻底突破无明。
이 ‘길’이 全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원래 해만행 동화선사 2020-03-27 22:09 46 듣기
개시하다.
이 몇 가지 ‘길’을 알고 있다면, 그 길 안에 있다.
동화선사 방장 ┃ 만행 대僧
양정당 개시
[동화선]
사람을 본심으로, 일을 빌려서 마음을 훈련하다
인생을 깨닫고, 인생을 바치다.
너는 올바른 견해를 알지 못한다.
아직 못했기 때문이다.
[시도]
도대체 무슨 말이냐? 여기서 말하는 견해는 견해적인 견해가 아니라 理性적인 견해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배우지 않고 비교적 순수한데, 부처를 배우면 몇 년 후 오히려 헛소리를 하는 습관을 쌓아 왔다. 항상 부처의 경계로 주변 사람들을 측량하고, 결코 이 尺子로 자신을 측량하지 않는다.
배우는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른바 통찰하는 것은 바로 통찰이다.왜 많은 学生들이 깨닫고 놓을 수 없는가?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道을 본 후에도 계속 수련하지 않는다면, 탐욕과 둔한 의심은 여전히 매우 무거울 것이다.
오직 수도를 통해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하는 증도를 통해서만 이러한 습관을 제거할 수 있고, 세상의 공명리록 등 각종 욕망을 놓을 수 있다.즉, 한 사람이 진정으로 내려놓으려면 반드시 열매 자리에서 해야 돼야 한다.
진정한 道을 보는 사람은 그의 생각은 반드시 정지하고 정견이어야 한다.그러나 그는 단지 첫 결과를 증명했다.첫 果效을 증명한 사람은 단지 견해를 끊었을 뿐이며, 견해는 이론적 지식이다.오직 그가 증명한 후에야 思想을 뛰어넘을 수 있다.
사실, 지금 많은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는 수준조차 도달하지 못한다.
사람이 도를 보지 못할 때, 부법에 대해 정지정견이 생기지 않고, 매번 스승을 만나면 따라 走动한다.오직 道을 본 후에도 보사가 앞에 오더라도 움직일 수 없다.왜냐하면 그는 정지하고, 정견하고, 올바른 결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 부처를 배우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데, 누구든지 듣는 것은 모두 도리가 있는데, 장 “대사”, 왕 “대사”, 어느 대사도 그를 움직일 수 있습니까?왜냐하면 그는 부처를 배우는 심각한 경험이 없고, 자신의 부처학 사상이 없기 때문에, 외경에 옮겨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혼란을 깨뜨린 후에야 깨닫고 놓을 수 있다.깨닫는 것은 이론이고, 내려놓는 것은 공구이다.
보통 어떤 부학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 도위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지만, 수도, 증도에 대해서는 아직 grasp할 수 없다.단지 혼란은 듣기법의 결과이다.그것은 지식이며 지식이다. 끊은 의심은 수증의 결과이다.그건 증언이고, 그건 공포이다.
너는 지혜가 없다.
아직 못했기 때문이다.
[깨달음]
여러분은 아마도 소동파와 부印禅师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들 두 사람은 아주 좋은 관계로, 불학 이론에서도 비슷하다.
서동파는 깨달음의 도이고, 증명의 도가 없다. 그러나 불인 선사들은 이미 철저하게 깨달았고 증명하였다.두 사람의 悟道의 가를 함께 놓으면悟하지 않은 사람은 공의 위 아래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들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선논도를 이야기한다. 소동파는 비록 문자가 높지만 실상이 높지 않아서 종종 부印禅师에게 패배한다.
어느 날 소동파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을 한 가를 썼다.“천은 하늘의 光照를 받게 하였으니, 천은 하늘의 光照를 받게 하였다. 여덟 바람이 불지 않고, 보금련에 앉아 있다.” 사람을 파견하여 불인 선사처로 보내다.
선사가 보고 종이에 네 글자를 썼다: "방귀, 방귀!" 그리고 오신 사람에게 가져오게 한다. 소동파는 보자마자 갑작스럽게 뛰어올랐고, 작은 배를 타고 부印禅师 이론을 찾아갔다.
배가 닿지 않았을 때 부印禅师가 이미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웃으며 “팔바람이 불지 않고 강을 건너오니!” 사도(사도)는 “부끄러워, 부끄러워!”라고 说。그 이후로 소동파는 부법에 대해 더 깊은 理解을 얻었다.
왜냐하면 佛法는 자성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다마祖师님은 수련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이입, 다른 하나는 행입. 소동파는 항상 이로 들어오고, 행로 들어오지 않았다.실제로 입입과 입입은 분리될 수 없다.
현재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과장하고, 말과 행동은 성급하고 경솔하고, 습관은 조금도 없애지 않았고, 부처님을 말해 왔는데 처음부터는 도이다. 중요한 순간에 부법을 抛光하다.佛法는 이론이 아니라 일상적인 기능에 나타난다.
道을 보는 사람은 여전히 탐욕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업습에 의해 인도된다.단지 말로는 비교적 선변하지만, 기전변화에서는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다.그러나 행동에서 그가 证词을 얻었는지 알 수 있다.
두조 신광은 다마 초조에게 法求하기 전에 중원 일대에서 이미 유명했다. 그가 다마의 첫 조상에게 법을 구할 때, 다마는 그에게 “나는 이게 큰 法이야, 작은 뿌리와 작은 도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의 신광은 다마의 눈에는 여전히 작은 根 작은 도구로 다마의 법을 수련할 자격이 없다.사실상 신광은 이 때 이미 논재가 방해가 없으며, 이미 시혼을 돌파하여 수道의 차원에 도달하였고, 단지 증명도 부족하였다.
불교는 탐욕과 사독에 대해 말하는데, 앞의 두 독은 한 명의 선도자(선도자)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사독은 여전히 존재한다.
근본 지혜가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证道 자리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반드시 证道 자리에 들어가서 다시 나가야 마지막 독을 극복할 수 있다.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지혜를 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몇 명이 열 수 있습니까?탐욕과 분노조차도 초월할 수 없으며, 어떻게 최후의 痴毒을 초월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너의 마음과 몸을 쥐지 못한다.
아직 못했기 때문이다.
【修道】
修道을 하기 전에 반드시 철저히 도를 보아야 하며, 修道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예를 들어 수도 전에, 수련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반응에 대해 理解해야 한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만나기 위해서다.진정으로 道을 깨달은 사람은 나중에 수련 과정에서 발생할 문제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두 잘 알고 있다.이것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见解이 아니다.
진정한 견해는 반드시 몸과 정신을 직접 보아야 하고, 몇 가지 깨달음과 知性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진정으로 道을 본 사람은 몸과 정신, 기질이 분명하게 변하고, 말도 다르게 변할 수 있다.특히 일을 하는 데, 그리고 생사에 대한 불常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사실 수도의 절반은 반드시 시도에서 完成해야 한다.修道, 증道이란 그것을 체험하고 검증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동화禅寺에 오기 전에, 오는 방향, 어느 차로 타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왔을 때, 알고 있는 방향과 경로를 따라 걷는 것은 틀림없다.
수도, 증도 역시 见道의 기초를 놓고 길을 간다.한 발을 밟기 전에 이미 충분히 확신하고, 한 발을 밟으면 틀림없이 자리에 잡고,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똑한 사람이 일을 하는 것처럼, 일을 하는 동안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기 전에,이미 계획이 있다.일단 발을 내놓으면 반드시 편차하지 않을 것이다.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그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며, 계획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고대인들은 关押하기 전에 이미 명심하고 본성이 있다고 말한다. 눈앞이 어두워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본을 깨지 않으면 산에 들어가지 못하며 중关이 없으면 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사실상 断见惑는 명심, 즉 道을 가리키는 것이다.엄격히 말하면 이미 见性 단계에 들어갔지만 아직 见性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치 初禅에 이르렀고, 初禅에 들어갔지만, 아직 初禅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과 같다.이것은 그가 초선을 넘어선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들어와서 다시 나가야만 두禅에 도달하고 두禅에 들어가야 한다. ……
修道을 본 공이 완성된 후에 다음 단계가 바로修道이다.
수도의 과정은 또 두 차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는 생리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 측면이다.이 두 가지를 완료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가?
만일 당신의 견해가 정확하다면, 당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3년 동안 禅定을 수련하면 마음의 무시경 이후의 업습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때야 말로 자기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 以前의 견해가 진리이기 때문에 실수와 협력하여 하나 진리리를 결합하여 주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생리적 면의 수도가 완수되면, 다시 심리적 인 mindset를 수련합니다.마음의 面에서는 절반의 노력이 붉은 먼지 속에서 완성되었다.
나는 산 위에서 마음의 50%만 수련할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은 붉은 먼지 속에서 完成해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혼자 있을 때, 사람, 일, 사물, 이리에 직면하지 않을 때, 내면의 세계가 온통 평온하고, 너는 너의 업습이 더 이상 없어졌다고 오해할 것이다.복잡한 사람, 일, 사물, 이리에 직면할 때, 당신은 still 내면에서 파도가 솟아오르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련의 과정에 있어서는 모든 마음동생을 깨달을 수 있도록 成就해야 한다.만약 깨달음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still 수련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시작해도, 단지 修道 도중에 있을 뿐,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마치 ‘관음동’에 들어가는 것은 절반의 工作일 뿐, 들어가고 나서 나가야 한다면 완전한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비록 네가 수도 자리에 들어오고 다시 나가더라도 반드시 증도 자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修道의 도중에 한 단계가 더 어려워지고, 뒤로 갈수록 실질적인 문제에 닿기 때문이다.
너는 '나'가 있고 업장애가 있다.
아직 못했기 때문이다.
[증명]
첫걸음은 도를 보는 것은 완전히 ‘리’이며, 첫걸음을 마치고 수道에 들어가야 ‘사’와 하나가 된다.证道위에 도달할 때, 일과 하나가 아니라 일과 하나가 아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예를 들어, 한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당신은 감히 물에 뛰어내려서 아이를 해안에 浮动해 주고, 자신은 손상되지 않고, 물 한입이라도 숨을 막지 않고,그리고 세 번 다섯 번도 할 수 있습니다.쉽게 이렇게 하다.하는 것이야 진정한 노력이다.
한 번 경계를 겪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成功한 것은 아니다. 반복해서 구출해야만, 백발 백중.
证人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 들어갈 수 없다면,众生의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없다. 만일 外来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러분은 증거하는 사람이 물에 있습니까, 아니면 해안에 있습니까?증언하는 자는 나도 없는데, 만약 그가 물에 있거나 해안에 있더라도 어떻게 나도 없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관음보살이 천백억의 화신을 갖게 된 것은 바로 내가 없기 때문이다. 众生들이 피곤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나 때문에.
예를 들어, 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돈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thinking한다. 언젠가 통치할 수 없을 때 그는 非常 고통스러울 것이다.
만일 무자에 도달한다면 where 돈이라는 개념이 남아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아프게 될까?‘나’를 가지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업障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이 업장애를 갖는 이유는, 하나는 다른 사람의 업장애를 모으고, 두 번째는 자신이 잘못한 일을 하는 업장애를 背书하는 것이며, 둘 다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너무 重心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가볍게 집어넣기 때문에 매우 简朴하게 살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공명 이룩, 생은 가져오지 않고 죽은 것은 가져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일과 一旦 만나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道을 증명하려면 몸과 정신을 열어 주위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감히 개방하지 않고 주위의 모든 것을 face하지 않는다면, 증도를 말하지 말고, 수도조차 수련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감히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직면하기 때문이다.만약 잘못을 저지른다면, 감히 인정하거나 대면할 수 없다면, 자신을 설명하고, 변호하고, 핑계하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한 일을 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부문에서 말하는 것도 내 느린 마음의 표현이다.한 사람이 틀림없이 말하지 않을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mistake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법은 내면의 동기를 보는 것이다.한 가지를 분명히 보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고, 내 마음은 매우 clear.
지금 믿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학부’라고 说。 왜냐하면 그들이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만약 그들이 부처를 배워야 할 마음, 조건, 자질을 이해한다면, 얼mana 땀을 흘리게 될 것이다.
도(道)을 보지 못하고 도(道)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수道(修道)이라고 口中 주장한다.그래서 고대인들은 배울수록 겸손하고 수련할수록 자신을 작게 느낀다.
사실, 모든 일을 한 점에서 뚫고, 결국 사방, 심지어 열방으로 radiation한다. 四面八方에서 자르고 결국 한 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문에서는 “모든 것을 통하는 것은 태양이 공허한 곳과 같아서 온大地을 비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허"를 테스트합니다.
[이탈도] 아니면 [합도]
첫 두 과목에서 나는 ‘깨달음’을 했다. 그 후에는 选择(选择)이 있고, 그 후에는 택(택)이 있다.여기서 ‘깨달음’과 ‘눈길’이 일치한다.
한 修道자는 念을 다 감지해야 하며, 합도인지 탈도인지를 알 수 있다.때로는 길에 있을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생각도 도망가며 길에 맞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까?한심만 묵상하면 합도가 아니다. 만일 한심으로 부처를 염려하는 것이 합도다 해도 한심으로 菜를 잘라내는 것이 합도다.
왜냐하면 모두 한마디로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으며, 呪文을 낭송하고, 인장을 맺고, 말을 참고하며, 또한 한마디로 가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정한 합도는 전혀 의도적으로 한 가지 생각을 부처를 念佛, 주문을 지니고, 인장을 맺고, 참담 머리에서 낳을 필요가 없다. …… .
한 문구가 “현재는 도다, 왜 돌려야 합니까? 돌이켜보면 머리가 안정된다.”너의 마음은 혼란스럽고,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하여라. 너는 한마디로 혼란스러우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한마디로 혼란스러우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항상 자신의 기심동念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스승이 당신에게 한 법을 주면, 당신도 수련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네가 항상 네 자신의 각 心动念을 인식할 수 있다면, 어떤 법도 수련할 필요가 없다.왜냐하면 네가 이미 나의 집행과 법 집행을 깨뜨렸기 때문이었지만, 아직 깨지지 않은 공행이 still 있다. 나의 집착은 주관적이며, 법 집착은 객관적이며, 모두 집착이다.
텅 비어 넣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돈에 대해 얕보는 사람은 언제든지 布施을 하고 있지만, 布施 후에는 남이 공덕비에 그의 이름을 새기는 것을 좋아한다.이것은 그가 돈을 내려놓았지만 아직 공명도 내려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내가 attachment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고, 항상 someone가 알고 싶어한다. 아무도 알지 못해도 마음은 기쁘다.이것은 그가 아직 완전히 공허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비어있는 사람은 나도 없고, 할 수 없고, 심지어 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부문에서 말하는 ‘나 공, 법 공, 공도 공’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없으면, 할 수 없으면, 모든 것이 空洞”라고 말합니다. 매일매일 공허를 말하고 공허에 집착한다.‘공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여전히 ‘有’이다. 뭐가 있습니까? “공허”의 영역이 존재한다.
한 사람이 일을 열심히 하고 온전히 추구하지만, 그 후에는 흔적이 없다.이리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한 일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다면, 끝난 후에도 마음속에 그 일을 残留해야 하며, 어떻게 그 후에도 흔적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로, 한 가지에 대해 온전히 노력해야만 온전히 놓을 수 있다.힘은 온전히 오고, 걷는 때도 온전히 걷기 때문에 흔적 없이 지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우는 과정에서 이론과 방법이 많지만 일단 운전 기술을 습득하면 어떤 방법이나 이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차가 멈추자마자 마음은 사라졌고, 차 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깊은 마음속에 흔적을 남길 때만 半解할 수 있다.
우리가 한 가지에 직면할 때, 온전한 投入으로만 넘어갈 수 있습니다.만일 한심한 경영을 하지 않고, 전심으로 경험하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를 향하고 그를 되찾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 모두를 헌신하고 experiencing해야 한다. 온 마음을 投入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온 마음을 投入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
마치 한 사람이 문을 닫고 싶지만 문을 닫은 뒤에 밖에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전신을 投入해서 열심히 일하고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래서 关을 나가면, 그는 연애를 갖게 되고, 다시 关을 닫고 싶어할 것이다.
붉은 먼지 속에서 온전히 헌신하지 않고, 갈망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고, 한 번 수련하면 붉은 먼지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여전히 恋할 것이다.그러므로 깨달음은 진리깨달아야 하고, 수련은 실수해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할게요.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어떤 차원에 있는가, 수도, 증도에 있는가?
오직 증도 자리에 들어가면 지혜, 즉 실상般若이 열릴 수 있다.증도 자리에 들어오기 전에는, 비록 당신의 언어般若, 글般若이 이미 열렸지만, 아직 무명을 돌파하지 않았다.오직 실상처럼 열려야만 무명함을 철저히 breakthrough할 수 있다.
万行佛佛佛法语